의사가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6일 서울 용산 전자랜드 2층 랜드홀에서 ‘최선의 진료를 위한 진료제도 개선방안 마련 토론회’를 개최했다.

의사가 의료현장에서 진료를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유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의료법상 진료거부금지 규정에 위배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현행 의료법 제15조(진료거부 금지 등)제1항은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

이번 토론회는 의사의 의학적인 판단과 소신진료를 담보할 수 있는 제도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고려대학교 좋은의사연구소 김기영 교수는 주제발표를 통해 독일에서의 진료거부 논의과정을 설명하면서 정당한 진료거부 사유를 소개했다.

김 교수는 “독일의 경우, 의사가 치료계약을 체결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며, 의사가 경제적 이유로 계약 체결을 피하고 실제로 치료를 수락하지 않으면 민법상 진료할 의무는 없으며 의료수준에 합당한 조치를 취할 의무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반면, 건강보험공단 소속 의사의 경우, 환자를 치료할 의무가 있는데, 환자가 과도한 행동을 하거나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경우, 비효율적이거나 비경제적인 진료의 이행, 특정 부적절한 약의 처방, 과도한 업무로 의료의 질적 유지를 할 수 없는 경우, 의사가 환자 진료를 거부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독일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의사가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를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의료정책연구소 이얼 책임연구원도 “진료거부 금지 조항을 삭제하거나 선언적 규정으로 전환해야 하며, 벌칙조항은 삭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원은 “진료거부가 정당했는지 여부는 의사의 직업윤리의 문제이다.”라며, “윤리지침 및 KMA Policy를 통해 정당한 사유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토론자들도 진료 거부의 정당한 사유를 명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법무법인 지우 이준석 변호사는 “변호사는 진상 의뢰인이 오면 상담만 하고 수임을 거부하면 된다. 하지만 의사는 까다로운 환자가 와도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라며,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시대에 의사들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한 의료법 15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지금은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환자가 병원이나 의사를 선택해서 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의료법 15조가 바뀌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의료법상 정당한 사유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서 복지부 유권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라며, “의료법에 정당한 사유를 규정하거나, 하위법인 시행령에라도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응급환자의 진료거부 금지도 풀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대한응급의학회 이경원 섭외이사는 “응급환자를 보건복지부가 시행규칙으로 정한다. 경미한 외상이나 타박상, 만취, 배가 아파도 응급증상 또는 응급에 준하는 증상으로 분류된다. 현실적으로 응급환자의 90%에서 95%가 응급증상에 해당한다.”라고 지적했다.

이 이사는 “응급실 폭력이 증가하고 있는데, 하나의 해결책으로써 응급환자 거부 금지의 족쇄를 풀어야 하는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대한개원의협의회 이혁 보험이사는 “의료정책연구소에서 정당한 진료 거부의 가이드라인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회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의사협회는 진료거부 가능한 내용을 고시에 규정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특히, 이 이사는 강제지정제 폐지 또는 형사면책권 도입을 요구했다.

이 이사는 “강제지정제는 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의사 인권유린 법안이다.”라며, “사회적 상황에 맞게 폐지하거나 상호동등한 구조로 개정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료비 원가율이 65%인 상황에서 개원의가 손해를 보면서 진료를 강제하는 법안은 불합리하다.”라며, “강제지정제를 폐지하거나, 유지하려면 형사적 책임에서 자유롭도록 형사면책권을 도입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연세대학교 의료법윤리학연구원 김소윤 원장도 “독일은 건강보험이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보험자도 단일 보험자가 아니어서 우리나라와 다른 측면이 있다면서도, 독일에서 일부 건강보험의사의 진료금지를 허락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건강보험 진료와 비교는 가능하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다만, 김 원장은 “의사들의 단체행동에 대한 처벌조치로 전료거부금지 조항을 들 수 있는데, 지금 시점에서 진료거부권을 요구하는 것은 단체행동을 하기 위한 의견을 낸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최선의 진료는 보는 관점에서 다를 수 있다며 보다 큰 틀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소비자시민모임 엄명숙 서울지부 대표는 “최선의 진료를 어느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라며, “의사만이 아닌 국민과 환자 관점에서 보고,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엄 대표는 “환자와 국민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값싸고 질좋고 의료서비스를 원한다. 환자가 필수중증치료나 골든타임 내에서 진료를 받아서 생명을 건질 수 있도록 의사들이 이야기를 해 줄 때 공감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엄 대표는 “의사 입장에서는 마음대로 환자를 보고 마음대로 치료할 수 있는게 최선일 수 있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과잉진료일 수 있다. 또, 정부는 적정수가를 이야기한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큰 틀, 즉 환자와 국민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헬스포커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